공공기관은 국민 모두에게 열려 있어야 하며, 누구든 차별 없이 동등하게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인도 사회에서는 병원, 학교, 행정 사무소, 경찰서 등 공공기관 내에서도 카스트에 따른 은근한 차별과 배제가 여전히 존재한다. 이는 명시적인 법적 제한이 아닌, 태도와 환경, 관행에 스며든 ‘미묘한 차별’로 작동하며, 하위 카스트 시민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출입은 가능하지만, 대우는 다르다
인도 헌법은 공공기관 이용에 있어 모든 시민의 평등한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그러나 실생활에서는 하위 카스트 출신 시민이 공공기관을 방문했을 때, 상대적으로 낮은 관심, 느린 응대, 불친절한 태도 등을 경험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는 명시적 거부가 아닌, ‘보이지 않는 대우의 차이’로 나타나며, 상대방이 자신의 신분을 눈치채지 않더라도 이름, 말투, 거주 지역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카스트가 추정되면서 차별이 작동하게 된다. 예를 들어 행정 사무소에 어떤 문서를 발급받기 위해 찾아갔을 때, 상위 카스트 출신 시민은 신속하고 친절하게 안내를 받는 반면, 하위 카스트 시민은 이유 없는 대기, 중복 제출 요구, 불필요한 질문 등의 과정을 겪는 일이 있다. 이러한 차별은 규정상 불법이지만, 너무도 일상적이고 미묘하게 이뤄지기에 외부에서는 인식조차 어렵다. 병원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 같은 시간에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달리트 환자는 뒷순위로 밀리거나, 응급 진료를 미루는 사례가 있으며, 일부 간호 인력은 불쾌감을 드러내며 대면을 회피하기도 한다. 이는 단지 불편한 경험에 그치지 않고, 실제 건강권을 침해하는 수준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공공기관 내 차별은 하위 카스트 시민이 제도에 대한 불신을 갖게 만들며, 국가에 대한 소속감과 신뢰를 약화시킨다. "가봤자 무시당한다", "민원 내도 처리되지 않는다"는 인식은 곧 제도적 배제의 고착으로 이어진다.
차별은 미묘하지만, 그 영향은 뚜렷하다
공공기관 내 미묘한 차별의 가장 큰 문제는 그것이 명시적이지 않기 때문에 문제 제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가령 동일한 민원을 제기해도 하위 카스트 시민의 요청은 지연되거나 반려되고, 같은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보조금이나 서비스의 배정에서 제외되는 경우도 존재한다. 그 과정에서 명확한 근거나 이유를 제시받지 못한 채, 단순히 “규정상 어렵다”, “절차가 복잡하다”는 말로 묵살되는 것이다. 교육청이나 마을 회의, 지역 복지센터 등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위 카스트 주민이 의견을 제시하거나 요청을 하면 공감이나 동의보다는 “무리한 요구”로 받아들여지며, 그 의견은 사실상 배제된다. 특정 공공사업에 참여하기 위한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거나, 서류 접수 기한이 고의로 늦게 통지되는 등 간접적인 방식으로의 배제도 이루어진다. 경찰서나 법원과 같은 권력기관에서는 이러한 차별이 더욱 위력적으로 작동한다. 하위 카스트 피해자가 고소장을 접수하려 할 때, 경찰이 사건을 축소하거나 조사를 미루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며, 특히 가해자가 상위 카스트일 경우 사건 처리는 더디게 진행된다. 이로 인해 하위 카스트 시민들은 피해 사실조차 외부에 알리지 못하고, 침묵 속에 문제를 감내하게 된다. 이러한 미묘한 차별은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를 붕괴시키고, 제도에 대한 기대 자체를 차단한다. 결국 평등의 원칙은 종이 위에만 존재하고, 실질적 불평등은 공공기관이라는 공간에서 재생산되는 셈이다.
공공의 이름으로 진짜 평등을 실현하려면
이러한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인도 정부와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공공기관 내 차별 감시 시스템을 도입하고, 카스트 기반 민원 차별에 대한 익명 신고제를 운영 중이다. 또한 공무원 대상 인권 교육과 감수성 훈련을 강화하면서, 무의식적 차별을 줄이기 위한 제도적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아직 지역별 편차가 크고, 실제 변화로 이어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일부 시민단체는 ‘투명 행정 캠페인’을 통해 공공기관의 서비스 처리 과정을 시민에게 공개하고, 각종 민원 처리 데이터를 계층별로 분석해 공개함으로써 차별적 관행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와 함께 지역 커뮤니티 기반의 권리 교육, 민원 도우미 양성 프로그램도 병행되며, 하위 카스트 주민들이 제도 속에서 자신들의 권리를 적극 행사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디지털 행정의 도입도 한 가지 대안이 되고 있다. 온라인 민원 신청, 전자문서 처리 시스템, QR 코드 기반 대기 시스템 등은 사람을 통하지 않고도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해 줌으로써, 직접 접촉 과정에서 발생하는 차별 요소를 줄일 수 있다. 그러나 디지털 접근성 자체가 또 다른 장벽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교육과 장비 보급도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공공기관은 단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장소가 아니라, 국가와 시민이 직접 만나는 가장 중요한 접점이다. 그 공간에서조차 차별이 발생한다면, 법과 제도가 말하는 평등은 공허한 이상일뿐이다. 진정한 공공성은 물리적 개방이 아니라, 모든 이가 존중받으며 대우받을 수 있는 ‘경험의 평등’ 속에서 실현된다. 카스트 없는 창구, 카스트 없는 응대야말로 인도 민주주의의 진정한 시험대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