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삶을 꿈꾸며 고향을 떠나는 이주 노동자들에게 도시는 기회의 공간일 수 있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그조차도 출신 카스트에 따라 제한되며, 이주는 곧 또 다른 형태의 차별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 글에서는 이주 노동자들이 도시에서 경험하는 카스트 기반 차별의 구조와 그 사회적 함의를 살펴본다.
고향을 떠나도 사라지지 않는 카스트 낙인
인도의 수많은 이주 노동자들은 생계유지를 위해 농촌을 떠나 도시로 향한다. 대부분이 일용직, 건설 현장, 공장 노동, 가사 서비스, 거리 상업 등에 종사하며, 도시 경제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그중 다수는 달리트나 OBC(기타 후진 계층) 출신으로, 농촌에서는 뿌리 깊은 차별을 피해 떠났지만, 도시에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낙인을 마주하게 된다. 이들은 고향에서의 카스트 정체성을 숨기려 하지만, 언어 억양, 외모, 등록 주소, 신분증상의 정보 등으로 인해 신분이 추정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지역 공동체 내에서 이미 '어느 마을 출신', '어떤 일에 종사하던 가문'이라는 정보가 퍼져 있는 경우, 고용주나 주변인들은 자연스럽게 위계를 재구성하고, 이주민은 또다시 하층 노동으로 밀려나게 된다. 심지어 공동 숙소나 고용 계약에서도 차별이 드러난다. 하위 카스트 출신 이주자는 더 열악한 공간에서 생활하며, 동일 노동을 제공해도 임금 차별을 경험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 같은 작업 현장에서도 보호 장비나 휴식 시간, 식사 공간 배정에서 차별이 존재하는 등, 보이지 않는 위계가 도시 한복판에서도 되풀이된다. 도시는 원래 출신 배경을 지우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카스트가 그 사람의 정체성을 따라다니며, 이동마저도 자유롭지 못하게 만든다. 이주가 해방이 되지 못하고, 또 다른 구속이 되는 이유다.
도시 속 새로운 착취 구조와 이중 고립 족쇄
이주 노동자들은 도시에서 단지 경제적 약자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동시에 사회적 주변인이며, 문화적 이방인이다. 도시에서의 사회적 자본이 부족한 이들은 고용주, 임대주, 행정 시스템 등 모든 영역에서 차별과 불이익을 감당해야 하며, 특히 하위 카스트 출신일수록 이러한 이중 구조에 깊숙이 놓이게 된다. 대표적으로, 건설 노동 현장에서는 숙소와 식사, 위생 조건이 계층적으로 나뉘는 일이 많다. 비공식 하도급 체계 속에서 달리트 노동자는 가장 위험한 작업, 가장 낮은 임금의 일에 배치되고, 계약서조차 없는 상태로 고용되기도 한다. 이러한 불안정한 노동은 항의나 문제 제기조차 어렵게 만들며, 카스트 기반 침묵의 문화는 도시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여성 이주 노동자는 더욱 취약하다. 가사 노동, 식당일, 재봉업 등 비공식 여성 노동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달리트 여성들은 성적 착취와 언어적 모욕에 노출되기 쉬우며, 법적 보호망에서도 소외되기 쉽다. “저 출신은 원래 그런 일 한다”는 고정관념은 차별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고, 이는 노동권 침해로 이어진다. 또한 임대주택 시장에서도 이들은 종종 입주를 거부당하거나, 월세를 더 많이 요구받는 등의 불이익을 경험한다. 도시 내 공간의 계층화는 출신지를 기준으로 은밀하게 이루어지며, 이는 결국 ‘도시 속 카스트 구획화’라는 새로운 문제를 만들어낸다. 결국 이주 노동자들은 경제적 빈곤, 사회적 고립, 제도적 배제라는 삼중의 구조 속에서 살아가게 되며, 이주가 더 나은 삶이 아니라, 더 정교한 착취의 시작이 되는 경우가 많다.
해방의 공간으로서 도시를 만들기 위해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복지 정책을 넘어, 도시 정책 자체가 이주자와 하위 계층의 현실을 중심에 두고 설계되어야 한다. 먼저, 이주 노동자들의 법적 권리 보장을 위한 통합 노동법 개정과 노동 계약의 표준화가 필요하다. 특히 하위 카스트 이주자의 인권 보호를 위해, 신분 정보 공개 없이도 고용과 주거가 가능하도록 하는 보호 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또한 일부 도시에서는 이주 노동자 전용 임대주택 공급, 건강보험 등록, 이동 진료소 운영 등의 정책이 시도되고 있으며, 이는 단기적으로 효과를 내고 있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변화는 사회적 인식의 전환에서 비롯된다. ‘출신이 아니라 능력’, ‘고향이 아니라 기여’라는 기준이 도시를 구성하는 가치로 자리 잡을 때, 진정한 해방의 공간이 될 수 있다. 비영리단체와 노동조합, 시민사회단체들은 이주 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연대를 강화하고 있으며, 특히 여성 노동자 대상 법률 교육, 자조 모임, 생계 지원 사업 등을 통해 자립 기반을 마련해 주고 있다. 동시에 일부 미디어는 이주 노동자의 이야기를 전면에 내세우며, 그들을 단순한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도시를 움직이는 주체’로 조명하고 있다. 도시는 누군가에게는 약속된 기회의 땅이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신분과 차별이 이어지는 공간일 수 있다. 우리는 이주 노동자의 현실을 통해 도시의 민낯을 보게 되며, 그들의 권리를 보장하는 일이 곧 도시 전체의 정의를 실현하는 일임을 인식해야 한다. 진정한 이동의 자유는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계층 없는 존엄의 문제임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