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이라는 말은 따뜻한 공동체와 상호 신뢰를 떠올리게 하지만, 인도 사회에서 이 단어는 반드시 평등과 연결되지 않는다. 특히 카스트 제도는 이웃 간에도 물리적·심리적 경계를 만들어왔고, 같은 공간에 살아도 결코 가까워질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세워왔다. 이 글에서는 카스트가 만든 이웃 간 거리의 본질과 일상 속 작동 방식을 탐색하고, 변화 가능성을 짚어본다.
거주지는 같아도 경계는 분명한 인도의 이웃 관계
인도의 수많은 마을과 도시 외곽에는 다양한 계층이 함께 거주하지만, 그 안에는 명확한 사회적 구획이 존재한다. 특히 농촌 지역에서는 마을 중심에 상위 카스트가, 주변부 혹은 마을 외곽에는 하위 카스트 또는 달리트가 거주하는 식으로 공간적 구분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다. 이는 단순한 경제력 차이나 주택 조건의 차이가 아닌, 오랜 세월에 걸친 사회적 위계질서의 결과물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이웃’은 지리적으로 가깝더라도 심리적으로는 멀 수밖에 없다. 달리트 가정이 상위 카스트 주민과 같은 우물을 사용하거나, 마을 회의에서 동등하게 발언하는 것조차 금기시되는 지역도 존재한다. 어떤 마을에서는 심지어 결혼식에 이웃을 초대할 때 카스트에 따라 좌석을 분리하거나, 음식 제공의 시간대를 달리하는 일도 있다. 도시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이어진다. 특정 아파트 단지나 주택가에서는 같은 블록에 살더라도, 입주민 커뮤니티 모임에 하위 카스트 출신이 배제되거나, 이웃으로서의 관계가 극도로 형식적이고 제한적인 경우가 많다. 서로의 이름과 얼굴은 알지만, 진정한 관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면에는 “같이 어울리면 안 된다”, “가까워지면 위계가 무너진다”는 무언의 규범이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카스트는 ‘이웃’이라는 개념조차 왜곡시키며, 공동체가 아닌 집단 속 개별 존재로 사람들을 고립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이는 단지 개인의 외로움이나 차별 문제를 넘어, 사회 전체의 신뢰 자본을 약화시키는 구조적인 문제다.
일상의 접촉 속에서 드러나는 간극
카스트에 따른 이웃 간의 거리감은 일상의 사소한 접촉에서도 빈번히 드러난다. 대표적으로 공동 우물 사용, 공동 마당에서의 놀이, 마을 행사 준비 등의 과정에서 ‘함께’라는 개념이 허용되지 않는다. 같은 거리에 사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식수를 함께 나누지 못하고, 놀이 친구가 되어주지 못하며, 심지어 같은 시간대에 같은 공간을 이용하는 것조차 제한된다. 학교에서도 이런 간극은 아이들 사이에서 재생산된다. 부모 세대의 인식이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이되면서, 달리트 아이는 같은 반 친구이지만 점심을 함께 먹지 못하거나, 생일파티에 초대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사회화는 아이의 자존감을 저하시키고, 교육에 대한 흥미마저 잃게 만든다. ‘나는 이들과는 다르다’는 인식은 조기부터 각인되며, 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인간관계 전반에 영향을 미친다. 또한 주거지 근처의 상점이나 약국, 세탁소, 이발소 등에서도 차별이 벌어진다. 하위 카스트 주민이 방문했을 때 무시당하거나, 물건을 직접 건네받지 못하는 사례가 존재하며, 대기 순서에서 밀리는 경우도 흔하다. 공공의 공간에서도 ‘사회적 거리두기’가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셈이다. 이러한 분리는 단지 신체적 거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웃과의 대화 단절, 공동 문제에 대한 협력 회피, 갈등 발생 시 일방적 배척 등 심리적 거리까지 동반되며, 이는 곧 지역 사회의 결속을 약화시키고 갈등을 장기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이웃으로 살아간다는 것의 회복을 위하여
다행히도 도시화와 세대 교체, 교육의 확산은 이 같은 거리감을 서서히 줄이고 있다. 특히 청년층을 중심으로 카스트보다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경향이 늘어나면서, 다양한 계층이 함께 사는 환경 속에서 ‘이웃다움’을 회복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아파트 커뮤니티 행사, 지역 청년 모임, 비영리단체 주도의 마을 프로젝트 등은 카스트에 얽매이지 않고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통로가 되고 있다. 또한 SNS와 디지털 플랫폼의 보편화는 온라인상에서의 익명성과 평등성을 통해 다양한 이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나와 다르지만 이웃일 수 있다’는 경험을 쌓게 되며, 이는 오프라인 관계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부나 지자체에서도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시도 중이다. 혼합형 임대주택, 주민 참여형 의사결정 제도, 계층 간 통합형 교육 캠프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제도는 단기적인 편의보다는 장기적인 신뢰 구축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누가 이웃인가’에 대한 사회적 정의를 다시 쓰고 있다. ‘이웃’은 물리적 거리를 뜻하지 않는다. 서로의 삶에 관심을 갖고, 존중하며, 필요할 때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다. 카스트가 만든 간극이 이러한 관계를 방해하는 사회라면, 그 사회는 결코 건강한 공동체라 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같은 동네에 산다’는 사실을 넘어서, ‘같은 마음으로 산다’는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그 시작은, 아주 사소한 인사 한마디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