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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도 물려받는 사회, 카스트가 규정한 세습

by 지식머니부자 2025. 4. 23.

카스트 직업 관련 이미지


현대 사회에서 개인의 직업은 능력과 열정, 기회의 조합으로 결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인도 사회에서는 수천 년간 유지되어 온 카스트 제도가 직업 선택에까지 뿌리를 내려, 출생만으로 개인의 일생을 규정짓는 구조를 만들어왔다. 이 글에서는 카스트별 직업군 세습의 기원과 현실, 그리고 이 구조가 인도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살펴본다.

전통적 역할 분담이 낳은 신분화된 직업 구조

힌두교 경전에 기반한 인도 카스트 체계는 브라만(사제), 크샤트리아(전사), 바이샤(상인), 수드라(노동자)라는 네 바르나(varna)를 중심으로 사회를 나누며, 각 계층에는 고유한 ‘다르마(dharma, 의무)’가 주어졌다. 이 ‘의무’는 종교적, 도덕적 정당성을 갖춘 역할 분담으로 해석되었지만, 실제로는 각 계층의 직업군을 고정시키는 수단으로 작용했다. 브라만은 사제와 교사, 철학자와 같은 지적 직업을, 크샤트리아는 군인과 정치인, 바이샤는 상인과 금융업, 수드라는 장인·노동자와 같은 육체노동을 맡는 것으로 구분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직업 구분이 단지 기능적 분담이 아니라, 세습 구조로 고착되었다는 점이다. 즉, 브라만의 자식은 브라만이 되고, 수드라의 자식은 수드라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달리트와 같은 바르나 바깥의 계층은 시체 처리, 하수 청소, 가죽 가공 등 ‘불결한’ 일이라 불리는 직업에 배정되었고, 이는 결코 바꿀 수 없는 운명처럼 사회에 내면화되었다. 세습은 직업의 안정성을 보장하기보다, 신분 고착화의 수단이었고, 직업군 간의 위계질서는 곧 인간 가치의 서열화로 이어졌다. 오늘날까지도 일부 지역에서는 부모의 직업이 자녀의 장래 희망을 결정지으며, 가문의 ‘직업 전통’을 깨는 것이 공동체 내 배신이나 불경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현대 사회 속 여전히 반복되는 직업 세습

인도 헌법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명시하고 있으며, 차별 없는 노동 시장을 지향한다. 하지만 실제 현실은 다르다. 특히 비공식 노동 시장이나 지역 기반 직종에서는 여전히 카스트 기반 직업 세습이 광범위하게 작동한다. 예를 들어 특정 지역의 청소노동자, 가죽 장인, 도살업자, 전통 악기 제작자 등은 대대로 동일한 계층과 가문에서만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단순히 문화적 관습의 문제를 넘어, 교육과 훈련의 기회 자체가 불균등하게 제공되기 때문이다. 달리트 청년이 교사가 되거나 기술직에 진출하려 할 때, 교육 과정에서의 차별, 취업 시장에서의 불신, 지역 사회의 냉대 등 수많은 장벽에 부딪히게 된다. 그 결과, 출신 성분이 곧 진입 가능한 직업의 범위를 결정짓는 셈이다. 더불어 많은 하위 카스트 가정은 자녀를 조기에 노동시장에 투입시키며, 부모의 직업을 ‘배우는 것’이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한다. 이는 실제로 그 직업을 원해서가 아니라,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세습이 반복되는 구조를 만든다. 이 과정에서 직업의 다양성과 개인의 역량 발휘는 무시되고, 사회 전체의 잠재력도 위축된다. 또한 고용주나 채용 담당자의 편견도 여전히 존재한다. 일부 기업은 비공식적으로 특정 카스트 출신을 선호하거나, 출신 배경에 따라 역할을 한정 짓는 경우가 있다. ‘그 출신은 판매직에 적합하지 않다’ 거나 ‘고객 응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식의 편견은 직업 선택의 자유를 침해하는 보이지 않는 족쇄다.

세습을 넘어서기 위한 제도와 문화의 변화

직업 세습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인도 정부는 다양한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직업훈련 스킴(Vocational Skill Training Scheme), 기술 개발 이니셔티브(Skill India Mission), 청년 창업 지원 등이다. 이러한 정책은 단순한 복지가 아니라, 경제적 자립을 가능케 하며, 개인이 직업을 통해 신분을 넘어설 수 있는 실질적인 발판을 제공한다. 또한 일부 비영리단체와 사회적 기업은 전통적으로 세습된 직업군을 현대화하여 브랜드화하거나, 공정무역과 연계해 글로벌 시장으로 확장하는 모델을 운영하고 있다. 예를 들어 달리트 여성들이 만든 수공예품이나 가죽제품이 국제적 인정을 받으며, 자긍심과 경제적 독립을 동시에 회복하는 사례도 등장하고 있다. 교육 현장에서도 점차 진로교육을 강화하고 있으며, 학생들에게 직업 선택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프로그램이 확산되고 있다. 특히 카스트를 배제한 능력 중심 채용을 표방하는 스타트업, IT 기업들이 늘어나면서, 세습 구조를 거부하고 실력으로 평가받으려는 청년들의 움직임도 활발해지고 있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다. 직업은 가문이나 출신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의지와 능력으로 선택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야 한다. 더 이상 ‘무슨 카스트 출신이 그 일을 해?’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롭고 공정한 노동 시장이다. 그리고 그 시작은 출신이 아닌 가능성을 먼저 보는 눈에서 비롯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