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한 식수는 인간의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자원이다. 그러나 인도 사회에서는 이 기본권조차 카스트에 따라 제한되는 경우가 있다. 특히 농촌 지역이나 인프라가 취약한 곳에서는 우물, 펌프, 관정 등의 이용에서부터 노골적인 차별이 이루어지며, 하위 카스트의 주민들은 생명 유지조차 공동체로부터 배제당하는 현실에 직면한다. 이 글에서는 식수 접근성의 문제를 통해 드러나는 카스트 기반의 일상적 차별을 조명하고자 한다.
식수마저 허락받아야 하는 사람들
인도의 농촌 마을에서는 마을 공동의 식수 시설, 즉 손 펌프나 우물, 공공 수도가 주민들의 주요 식수원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공공’ 시설의 이용조차 모두에게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특히 달리트와 같은 하위 카스트 주민은 상위 카스트 주민들과 함께 물을 긷는 것을 금지당하거나, 같은 시간대에 사용하지 못하도록 제한받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어떤 마을에서는 우물이나 펌프 옆에 ‘브라만 전용’이라는 표식이 붙어 있거나, 달리트 주민이 사용한 기구를 따로 구분하여 세척하도록 강요당하기도 한다. 더 심각한 경우, 하위 카스트 사람이 손을 댔다는 이유로 우물을 매립하거나, 마을 주민 전체가 물 사용을 중단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이는 단순한 위생 문제를 가장한 신분 차별이며, 오랜 전통과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 차별의 형태다. 이러한 차별은 여성과 아이들에게 더욱 가혹하게 작용한다. 가정의 식수를 책임지는 여성은 멀리 떨어진 우물까지 물을 길어 다녀야 하며, 그 과정에서 신체적 피로는 물론 심리적 위축까지 경험하게 된다. 아이들 역시 등굣길 전이나 방과 후에 물을 긷는 일을 도맡으며, 그로 인해 학습 시간과 여가 시간이 줄어든다. 결국 물은 단순한 자원이 아니라, 공동체 내 신분 질서를 고착시키는 도구로 활용되며, ‘누가 누구의 물을 마실 수 있는가’가 인간의 위계를 나누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공공 정책과 실천 사이의 괴리
인도 정부는 헌법상 모든 시민의 평등한 공공 자원 이용권을 보장하고 있으며, 각 주정부는 식수 공급 확대를 위해 다양한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잘 지반 미션(Jal Jeevan Mission)’은 농촌 가정에 깨끗한 식수를 공급하기 위한 대규모 프로젝트로, 수백만 가구에 수도 연결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제도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는 여전히 카스트 기반 차별이 관행적으로 지속되고 있다. 문제는 대부분의 농촌 지역에서 식수 공급 관리가 지역 공동체의 손에 맡겨져 있다는 점이다. 물 저장 탱크의 열쇠를 특정 카스트 사람이 쥐고 있거나, 수도관이 특정 구역까지는 연결되지 않는 등의 ‘우연한 불평등’이 실제로는 구조적 차별을 은폐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심지어 관정이나 지하수 개발 예산이 상위 카스트 마을에 우선 배정되는 경우도 있으며, 하위 카스트 거주 지역은 ‘지반이 불안정하다’는 이유로 제외되기도 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NGO나 종교 단체가 식수 시설을 기증하기도 하지만, 그것조차 카스트에 따라 구획화되어 설치되며, 공동 사용을 꺼리는 경향이 강하다. 이로 인해 수원은 분리되고, 물은 또 다른 벽이 되어 마을을 나눈다. 도시는 사정이 나은 편이지만, 도시 외곽 슬럼 지역이나 달리트 거주지의 상수도 인프라는 여전히 취약하며, 수질 문제나 공급 불균형으로 고통받는 가정이 많다. 공공의 이름으로 공급되는 식수조차 공정하게 배분되지 않는 현실은, 제도가 의도를 실현하지 못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물의 평등을 위한 조건들
물은 생존의 기본이며, 어떤 이에게도 예외일 수 없는 권리다. 그렇기에 물에서조차 차별이 발생한다는 사실은 인도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이 얼마나 일상에 깊이 침투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기반 시설 확충만으로는 부족하다. 차별을 가능하게 하는 인식과 관행 자체를 뿌리째 흔들어야 한다. 우선, 식수 공급과 관련된 지역 의사결정 구조에서 하위 카스트 주민의 참여를 의무화할 필요가 있다. 물 관리 위원회나 사용자 그룹 내에 계층 간 균형을 보장하고, 공정한 배분 기준을 마련함으로써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 또한 공공 우물이나 펌프 주변에 인권 캠페인을 상시 운영하거나, 차별 신고 센터를 설치해 물리적 충돌 없이도 조정할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 교육을 통한 변화도 중요하다. 학교에서부터 물의 평등성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고, 어릴 때부터 공동체 내 자원 공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한다. 일부 NGO는 이러한 교육을 통해 마을 단위에서 ‘공동 식수의 날’ 캠페인을 열고 있으며, 이는 세대 간 인식 전환의 단초가 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물을 권력의 수단이 아닌 생명의 조건으로 바라보는 사회적 합의다. 누구든 같은 우물에서 물을 길을 수 있어야 하며, 물을 마시는 행위가 평등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 카스트 없는 식수, 차별 없는 물줄기가 흐를 때, 인도 사회는 비로소 가장 근본적인 평등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