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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에 따른 주거 분리와 공간 속의 차별

by 지식머니부자 2025. 4. 24.

카스트 차별 관련 이미지


거주는 인간의 기본적 욕구이자 존엄의 기초이다. 그러나 인도에서는 단지 어디에 사느냐가 곧 ‘누구인가’를 말해주는 사회적 표식이 되며, 카스트는 주거지의 위치, 질, 권리를 결정짓는 주요 기준이 된다. 이 글에서는 카스트 기반 주거 분리 현상의 역사와 오늘날 도시와 농촌에서 그것이 어떻게 재생산되는지를 조명한다.

공간으로 나뉘는 계층, 마을에서 도시까지

전통적인 인도 농촌 마을 구조를 살펴보면, 카스트에 따른 주거 분리는 명확하다. 마을 중심에는 브라만과 같은 상위 카스트가 위치하고, 마을 외곽이나 변두리에는 달리트, 수드라와 같은 하위 계층이 모여 산다. 이 분리는 단지 지리적 거리만이 아니라, 우물, 사원, 학교, 도로와의 접근성에서도 차이를 만들어내며, 하위 카스트는 기본적인 공공 인프라조차 제한적으로 이용하게 된다. 이러한 구조는 공동체 내부에서 물리적 경계를 통해 사회적 위계를 유지하는 방식이다. ‘그들은 이쪽으로 들어올 수 없다’는 규범은 단지 말로만이 아니라 길 하나, 벽 하나, 도로 하나로 구현된다. 일부 지역에서는 하위 카스트의 집은 진입로가 따로 있으며, 같은 마을이라 해도 ‘다른 공간’으로 인식된다. 도시로 넘어오면 이야기는 조금 복잡해진다. 표면적으로는 다양한 계층이 함께 거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도시 슬럼가, 비공식 정착촌, 달리트 전용 주택단지 등으로 분리된 공간 구조가 유지되고 있다. 도시 개발 과정에서도 재개발 지역에는 상위 계층이 우선 입주하고, 원래 거주하던 하위 카스트 주민은 외곽으로 밀려나는 현상이 반복된다. 이처럼 주거 공간은 계층 분리를 시각화하고, 카스트 차별을 구조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사는 곳이 곧 신분’이라는 인식은 단지 편견이 아니라, 실제 공간이 그러한 위계를 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장벽, 주택 시장과 행정 정책의 현실

카스트에 따른 주거 차별은 단지 공동체 내부의 전통이 아니라, 현대의 행정 시스템과 시장 논리 속에서도 재생산되고 있다. 예를 들어, 일부 민간 아파트 단지에서는 입주 신청 시 신청자의 성(姓)이나 고향, 직업 등을 통해 카스트를 유추하고, 입주 자체를 거부하는 사례가 존재한다. 이는 공식적으로는 금지되어 있지만, 서류상에는 드러나지 않는 비공식 관행으로 남아 있다. 임대 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하위 카스트 출신 세입자는 고액 보증금 요구, 입주 조건 강화, 계약서상 불리한 조건 삽입 등의 방식으로 차별을 겪는다. 특히 도심에 가까운 지역일수록 이러한 차별은 더 뚜렷하게 나타나며, ‘그런 출신은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기 어렵다’는 인식이 고착되어 있다. 정부의 주택 정책도 예외는 아니다. 인도 정부는 빈곤층과 하위 계층을 위한 주택 건설을 지속하고 있으나, 이러한 공공주택은 종종 도시 외곽, 인프라가 열악한 지역에 위치하며, 사회적 낙인이 붙은 공간으로 인식된다. 다시 말해, ‘지원받는 집’이라는 타이틀은 주거의 권리를 온전히 보장하기보다, 새로운 낙인을 만들어내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심지어 교육과 고용에서도 이러한 주거 정보가 차별로 이어지기도 한다. 주소만으로 특정 학교에 진학하기 어렵거나, 회사에서 해당 지역 출신이라는 이유로 고용을 주저하는 경우도 있으며, 이는 주거지가 개인의 미래 기회까지 제한하는 고리로 작용한다. 주거 공간은 단지 생활의 장소가 아니라, 사회적 소속과 이동의 경로를 결정짓는 구조물이 되는 셈이다.

경계를 허무는 공간 설계의 시작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주택을 많이 짓는 것’을 넘어서, 공간을 설계하고 배치하는 방식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재검토가 필요하다. 특히 공공 주택이나 도시 재개발 프로젝트에서는 계층 구분 없는 혼합형 배치를 원칙으로 하고, 커뮤니티 시설을 공유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단지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 속에서 상호 작용이 가능하도록 설계하는 것이 핵심이다.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통합 마을 주거 프로젝트’를 통해 다양한 카스트가 동일한 구역에서 함께 거주하도록 지원하고 있으며, 공동체 기반 자치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거버넌스 참여 기회를 확대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초기에는 저항이 따르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호 이해와 신뢰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고 있다. 또한 주택 관련 민원을 처리하는 부서에서 신분이나 출신지를 고려하지 않는 ‘익명 민원 제도’ 도입, 공공 임대주택 내 차별적 언행 금지 조항 삽입 등 제도적 정비도 병행되어야 한다. 주거지를 둘러싼 문화적 인식 전환을 위해 미디어와 교육 현장에서의 지속적인 캠페인도 필요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나 어디든 살 수 있어야 한다’는 당연한 원칙을 다시 확인하는 일이다. 집은 신분이 아니라 삶의 터전이어야 하며, 누구의 출신도 그 터전에서 배제되어선 안 된다. 공간은 인간을 담는 그릇이다. 그 그릇이 모두를 위한 것이 되려면, 경계가 아닌 연결을 지향하는 설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