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은 인간의 기본권이며, 의료 서비스는 생명과 직결된 공공재이다. 그러나 인도 사회에서는 카스트에 따라 의료 서비스의 접근성과 질이 달라지는 경우가 여전히 존재한다. 이 글에서는 병원, 보건소, 약국 등 의료 현장에서 벌어지는 카스트 기반 차별의 양상과 그 사회적 영향을 살펴본다.
병원 문턱에서 시작되는 차별
공공병원은 이론상 모든 시민에게 열려 있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환자의 출신 배경에 따라 대우가 다르게 나타난다. 하위 카스트 출신 환자는 진료 대기 순서에서 후순위로 밀리거나, 접수 과정에서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다. 응급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조금 기다려라"는 식으로 지연되거나, 상태가 가벼운 상위 카스트 환자보다 늦게 진료를 받는 경우도 존재한다. 간호사나 의사 역시 무의식적으로 환자의 말투, 복장, 제출 서류 등을 통해 신분을 추정하며, 그에 따라 태도를 달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농촌 지역에서는 달리트 환자가 병원 시설 사용을 제한당하거나, 특정 병실을 배정받지 못하는 사례도 보고된다. 이는 단순한 불친절을 넘어, 생명권에 대한 차별적 접근을 의미한다. 민간 병원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보험 가입 여부나 지불 능력을 이유로 표면적인 구분이 이뤄지지만, 그 이면에는 카스트 기반 편견이 작동하는 경우가 있다. 같은 비용을 지불하고도 하위 카스트 환자는 진료 설명을 충분히 듣지 못하거나, 추가 비용 요구를 받는 등의 불이익을 경험한다. 이러한 차별은 환자에게 심리적 위축을 초래하고, 결과적으로 치료를 미루거나 포기하게 만들며, 건강 악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는다.
공공 보건 시스템 내 구조적 불평등
인도 정부는 의료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보건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만, 카스트 기반 차별은 공공 보건 시스템 내에서도 구조적으로 존재한다. 보건소 배치, 예방 접종, 산모 관리, 영양 프로그램 등에서 하위 카스트 거주 지역은 상대적으로 인프라가 열악하고, 의료 인력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일부 지역에서는 보건소 이용 시간대를 카스트별로 구분하거나, 하위 카스트 거주 지역에 이동 진료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 경우도 발견된다. 예방접종 캠페인에서도 고위 카스트 마을을 우선 방문하고, 하위 카스트 마을은 뒤로 미루는 관행이 여전히 남아 있다. 특히 여성과 아동의 경우 피해가 더 심각하다. 산전·산후 관리 프로그램에서 하위 카스트 여성은 의료진의 무관심, 비인격적 대우, 필요한 지원의 누락 등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모성 사망률, 유아 사망률의 격차로 이어지며, 카스트 차별이 생명의 격차를 만들어내는 심각한 결과를 낳는다. 보건 통계 작성 과정에서도 문제는 이어진다. 하위 카스트 지역의 건강 지표는 종종 과소보고되거나, 문제로 지적되더라도 실질적 개입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는 단순한 행정 미비가 아니라, 차별 구조를 은폐하고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생명 앞에서 평등하기 위한 조건
의료는 그 누구도 차별 없이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의료 인력의 감수성 교육 강화가 필수적이다. 의료진에게 카스트 기반 차별의 실태와 문제점을 교육하고, 환자 응대 과정에서 평등한 태도를 유지하도록 지속적으로 훈련해야 한다. 또한 공공 보건 정책 설계 시, 단순히 의료 시설을 확대하는 것을 넘어, 하위 카스트 지역에 대한 우선 지원과 모니터링 체계를 강화해야 한다. 의료 서비스 제공 결과를 카스트별로 세분화해 분석하고, 불평등이 발견될 경우 즉각 시정 조치를 취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법적 측면에서도 의료기관 내 차별 행위를 금지하고, 위반 시 강력한 제재를 가하는 규정이 필요하다. 환자 권리 헌장을 확대하고, 차별을 경험한 환자가 익명으로 신고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 전체의 인식 변화다. 생명은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하며, 병원이라는 공간은 출신과 신분을 떠나 인간으로서 대우받는 마지막 보루여야 한다. 카스트 없는 의료, 평등한 치료권이 실현될 때, 인도 사회는 진정한 의미의 인권 국가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